사라예보 사건(Assassination of Sarajevo), 러시아 10월 혁명





1914년 6월 28일, 그 전날 육군 훈련을 견학하였던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황태자비인 조피는 환영 리셉션에 참석하기 위해 수행원과 함께 오픈카를 타고 시청으로 향하게 됩니다.


길가에는 많은 구경 인파가 몰려들어 기를 흔들면서 그들을 환영한 흔히 말해 지금의 퍼레이드와 같은 것이었죠,






이때 갑자기 수많은 군중속에서 뛰어나온 한 젊은이가 퍼레이드 행렬을 향해 폭탄을 던집니다.

황태자 부처는 무사하였지만 수행원과 구경 인파 중 부상자가 나오게 됩니다.

이 범인은 바로 카브리노비크라는 젊은 남성이었는데, 황태자 일행은 간신히 시청으로 가서 리셉션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역사박물관을 견학할 예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병원에 있는 희생자를 문병하기로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운전사가 미처 일정이 바뀐줄 몰랐던 것.... 계획대로 역사박물관으로 향하던 차는 병원으로 가기 위해 직진을 해야만 했지만 운전사는 역사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차의 속도를 늦춰 유턴을 하려 하였습니다.

이때 어디선가 총성이 울렸는데,, 황태자비 조피는 거의 즉사 상태였고, 황태자비를 몸으로 감싸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역시 중태였습니다.

두 사람은 황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얼마가지 못해 둘다 사망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을 피살한 범인은 프린치프라는 젊은 남자로 암살에 가담하였던 두 사람 모두 세르비아의 비밀결사단체인 일명 '검은손'의 일원이었던 것입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였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1세의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1세는 1848년 3월, 혁명으로 혼란스러워하던 오스트리아에서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오스트리아의 지배층은 젊은 황제를 즉위시켜 제정을 존속하려 하였습니다.

그의 황비는 합스부르크가 역사상 최고의 미인이라 불리는 엘리자베스였던 것....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장남 루돌프는 1889년 메이얼링에서 연인과 동반자살하게 됩니다.

프란츠 요세프1세의 바로 아랫 동생인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게 옹위되어 멕시코 황제가 됐지만 1867년에 처형되었습니다.

또한, 그 아랫 동생인 카를 루트비히는 종교심이 강하여 황제 자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

그래서 카를의 아들이자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황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아내 조피는 보헤미아 출신으로 귀족의 딸이기는 했지만 황비가 되기에는 신분이 낮아 황태자인 남편과 나란히 공식석상에 나갈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비극으로 끝나 보스니아 방문 때는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황태자비와 함께 가겠다고 주장하여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동행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는 다민족국가로,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는 민족주의가 유행했습니다.

이것은 국가와 민족은 일치해야 한다는 사상인데 때문에 여러 민족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는 민족주의에 대처해야 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에 패배한뒤, 1867년에 마자르인의 자치를 인정하고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형성했습니다. 그러자 마자르인 이외의 민족도 자치권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슬라브인 자치권 허용 문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으며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슬라브인에게도 자치권을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황태자비와 함게 보스니아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

더구나 그날은 공교롭게도 부처의 14번째 결혼 기념일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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